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거창 용원정의 봄 풍경을 펜 드로잉으로 기록하다

by PenAndLines 2026. 4. 25.
반응형

들어가며: 흩어지는 봄을 펜 끝에 남기다

봄 풍경을 보면 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모습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벚꽃은 특히 그렇습니다. 화사하게 피어 있는 시간은 짧고, 어느 순간 바람에 꽃잎이 흩어지기 시작하면 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에 펜으로 기록한 곳은 거창의 용원정입니다. 오래된 건물과 돌담길,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봄 풍경이 한 화면 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벚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오래 바라보게 된 것은 길의 흐름과 건물의 구조, 그리고 앞과 뒤에 겹쳐진 풍경의 거리감이었습니다.

풍경을 펜으로 그릴 때마다 늘 같은 고민을 합니다. 어디까지 자세히 그려야 할까. 어떤 부분을 진하게 해야 할까. 그리고 복잡하게 보이는 풍경을 어떻게 하면 한 장의 그림 안에서 정리할 수 있을까.

이번 용원정 펜 드로잉도 처음부터 쉽게 진행된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돌길과 돌담의 질감을 표현하다 선이 많아지기도 했고, 벚꽃의 가벼운 느낌을 살리고 싶었지만 욕심을 내면 화면이 금세 무거워졌습니다. 작업을 마친 뒤 다시 그림을 보면서, 이번 그림에서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줄였는가가 더 중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처음에는 디테일보다 전체 흐름부터 잡았다

용원정 풍경은 생각보다 화면 안에 들어 있는 요소가 많았습니다. 건물의 지붕과 기와, 돌담, 길바닥, 나무와 벚꽃까지 각각 따로 보기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부적인 형태를 그리지 않고 연필로 전체 구도부터 가볍게 잡았습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건물의 위치와 길이 이어지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다음 화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나무와 벚꽃의 흐름을 연결했습니다.

예전에는 스케치를 시작하면 마음에 드는 부분부터 먼저 그리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풍경 드로잉에서는 부분을 먼저 그리기 시작하면 나중에 전체 크기나 위치를 수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길과 건물이 함께 있는 풍경에서는 전체적인 구조가 조금만 흔들려도 공간감이 어색해 보이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처음 단계에서는 최대한 자세한 묘사를 미뤘습니다. 건물은 큰 형태로, 돌담은 하나의 덩어리로, 벚꽃은 정확한 꽃잎을 그리기보다 화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흐름만 먼저 확인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과정이 이후 작업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풍경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이 풍경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창 용원정 펜 드로잉 스케치 과정
전체적인 구도와 구조를 먼저 잡은 스케치 단계. 세부 묘사보다 길과 건물, 나무가 만들어내는 흐름을 먼저 확인했다.

2. 0.05mm와 0.1mm 펜으로 구조와 질감을 나누다

이번 작업에서는 주로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0.05mm와 0.1mm를 사용했습니다. 두 가지 펜을 사용했다고 해서 역할을 정확하게 나누어 기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의 성격에 차이가 생겼습니다.

0.1mm 펜은 건물의 구조나 길의 흐름처럼 화면의 기본적인 형태를 조금 더 분명하게 잡는 데 사용했습니다. 반면 0.05mm는 벚꽃과 나뭇가지, 돌담의 세부적인 질감처럼 조금 더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부분에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펜촉의 굵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선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였습니다. 얇은 0.05mm 펜은 부담 없이 계속 선을 추가하게 되는 장점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벚꽃 부분에서는 조금만 더 그리면 풍성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을 계속 추가할수록 처음에 느꼈던 봄 풍경의 가벼움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작업을 멈추고 그림에서 한 걸음 떨어져 전체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번 그림에서도 다시 느낀 것은, 좋은 펜을 사용하는 것보다 펜을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3. 돌길과 돌담을 그리며 선의 밀도를 조절하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오래 고민했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돌길과 돌담이었습니다. 실제 풍경을 보면 돌 하나하나의 모양도 다르고 표면의 밝기와 그림자도 제각각입니다. 처음에는 그 차이를 가능한 한 많이 담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돌의 외곽선을 하나씩 정확하게 따라가기 시작하면 화면 전체가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변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열심히 그린 것 같지만, 전체 그림을 보면 오히려 시선이 분산되고 복잡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돌 하나하나를 완성하려 하기보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덩어리를 먼저 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돌에 같은 밀도의 선을 넣는 대신, 그림자가 깊은 부분과 앞쪽에 가까운 부분만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선을 줄이거나 형태만 암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제 돌의 모양을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길의 질감은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펜 드로잉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질감은 선의 양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선이라도 어디에 모으고 어디를 비워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만들어집니다. 이번 돌길 작업도 결국은 더 많이 그리는 방법보다 덜 그리면서 형태를 남기는 방법을 고민한 과정이었습니다.

용원정 돌길과 돌담 펜 드로잉 과정
돌담과 길바닥의 질감을 표현하는 과정. 돌 하나하나를 모두 설명하기보다 선의 밀도를 다르게 하며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분했다.

4. 벚꽃은 그리는 것보다 비워두는 것이 더 어려웠다

봄 풍경을 그릴 때 벚꽃은 분명 눈길을 끄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펜으로 표현하려 하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실제 꽃은 밝고 가볍게 보이는데, 검은 선으로 계속 묘사하다 보면 금세 무거운 덩어리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번 그림에서도 처음에는 꽃과 가지를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이 많아질수록 벚꽃 특유의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화면 아래쪽의 꽃 부분은 작업을 하면서 '조금 더'라는 생각이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처음 의도보다 밀도가 높아진 부분도 생겼습니다.

그때 다시 생각한 것은 빛이 있는 부분까지 굳이 펜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꽃잎 하나하나를 모두 그리기보다 일부 경계와 그림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흰 종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흰 종이의 여백이 꽃의 밝은 부분이 되고, 몇 개의 선이 모여 벚꽃의 존재를 암시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아직도 꽃을 표현할 때마다 욕심을 조절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밝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흰색 물감이나 많은 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종이의 여백이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5.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차이는 선에서 시작되었다

풍경 드로잉에서 제가 가장 자주 고민하는 부분은 거리감입니다. 실제 풍경에서는 앞에 있는 돌과 멀리 있는 건물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지만, 그것을 모두 펜 선으로 옮기면 때로는 화면이 한 장의 평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번 그림에서는 가까운 부분일수록 형태를 조금 더 분명하게 잡고 선의 밀도도 높였습니다. 반대로 뒤쪽으로 갈수록 모든 형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선을 줄였습니다. 먼 곳의 나무와 건물은 가까운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남겼습니다.

이렇게 작업하니 특별히 강한 명암을 넣지 않아도 앞과 뒤의 차이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곳은 선이 모여 있고, 먼 곳은 상대적으로 비워져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이것이 한 가지 정답은 아닙니다. 그림마다 빛의 방향도 다르고 표현하고 싶은 분위기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번 용원정을 그리면서 저는 거리감을 만들기 위해 모든 곳에 같은 힘으로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구분하는 것은 복잡한 기법보다 선의 밀도와 형태의 생략 정도를 다르게 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거창 용원정 봄 풍경 펜 드로잉 완성작
거창 용원정의 봄 풍경을 펜으로 기록한 완성작. 돌길과 건물, 벚꽃을 모두 같은 밀도로 그리기보다 선의 강약과 여백을 달리해 화면의 흐름을 정리했다.

이번 그림을 그리며 다시 확인한 것들

작업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 먼저 보입니다. 이번 그림도 그렇습니다. 조금 더 단순하게 표현했으면 좋았을 부분도 있고, 반대로 조금 더 정리했어야 했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까지 포함해서 한 장의 그림이 남는 것 같습니다. 다음 그림에서는 이번에 아쉬웠던 부분을 조금 더 의식하게 되고, 또 다른 실수를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 처음에는 부분보다 전체 흐름을 먼저 본다.
  • 복잡한 질감은 모두 설명하기보다 밝고 어두운 덩어리부터 구분한다.
  • 얇은 펜일수록 쉽게 선을 추가하게 되므로 중간에 멈춰 전체를 확인한다.
  • 밝은 부분은 선으로 채우기보다 흰 종이의 여백을 활용한다.
  • 가까운 곳과 먼 곳에 같은 밀도의 선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는 특별한 공식이라기보다, 이번 한 장의 그림을 그리며 제가 다시 확인한 작업의 기준입니다. 다음 풍경을 그릴 때도 모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펜을 들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 볼 기준은 될 것 같습니다.

마치며: 사라지는 풍경을 한 장의 기록으로 남기며

벚꽃은 이미 흩어지고 지금의 용원정은 이 그림을 그릴 때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계절은 계속 변하고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도 빛과 날씨, 나무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완벽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날 내가 바라본 풍경을 한 장의 기록으로 남긴다는 마음으로 작업하려 합니다. 실제 풍경과 똑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때 무엇을 눈여겨보았고, 어디에서 오래 멈추었으며, 어떤 부분에서 고민했는지가 그림 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이번 거창 용원정의 봄 풍경도 그렇게 남았습니다. 돌길을 그리며 선의 밀도를 고민했고, 벚꽃을 그리며 비워두는 방법을 생각했으며, 화면 전체를 보면서 어디에서 펜을 멈춰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완성된 그림 한 장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과정에서 조금씩 쌓이는 이런 생각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이번 그림에서 느낀 아쉬움을 조금 덜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또 다른 아쉬움이 남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펜을 들 것입니다. 그렇게 한 장씩 그려가며, 지나가는 풍경과 그 순간의 생각을 계속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