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순천 선암사의 돌담길을 펜으로 기록하다
우연히 떠난 길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순천 선암사의 한적한 돌담길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좋지만, 마음에 남은 풍경을 직접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연필로 구도를 잡고 펜으로 한 선씩 옮기다 보면 사진을 찍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돌담의 흐름과 나무의 방향, 그리고 공간의 깊이가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이번 작업 역시 처음부터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선암사의 조용한 봄 풍경을 제 방식으로 기록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특히 양쪽으로 이어지는 돌담과 화면 중앙의 큰 나무, 그리고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의 흐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왼쪽 돌담은 비교적 단정하게 화면을 받쳐주고, 오른쪽 돌담은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중앙의 나무는 그 사이에서 공간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준점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그림에서는 대상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옮기는 것보다, 돌담길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흐름과 오래된 돌담의 질감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조금 더 집중했습니다.
1. 밑그림 단계: 돌담길의 흐름부터 먼저 잡았습니다
풍경 드로잉을 시작할 때 세부적인 나무나 돌의 모양부터 따라가면 전체 구도가 흔들리기 쉽습니다. 이번 그림에서도 가장 먼저 잡은 것은 돌담길과 나무의 큰 흐름이었습니다.
중앙의 큰 나무는 화면의 중심이지만, 실제 공간감을 만들어주는 것은 양옆 돌담과 길의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돌 하나하나를 그리지 않고, 왼쪽과 오른쪽 돌담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느 방향으로 이어지는지부터 연필로 가볍게 정리했습니다.

▲ 전체적인 구도와 원근의 흐름을 먼저 정리한 초기 스케치입니다. 오른쪽 돌담의 사선과 중앙 나무의 위치를 기준으로 공간의 뼈대를 잡았습니다.
📐 이번 작업에서 먼저 확인한 세 가지
- 돌담의 방향: 오른쪽 돌담이 안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먼저 잡아 길의 깊이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 중앙 나무의 위치: 나무를 너무 크게 잡으면 공간이 막히고, 너무 작으면 화면의 중심이 약해질 수 있어 전체 돌담과의 비례를 먼저 확인했습니다.
- 바닥의 여백: 마당 바닥까지 지나치게 묘사하면 화면이 무거워질 것 같아 필요한 흐름만 남기고 일부는 비워두었습니다.
돌담길처럼 방향이 분명한 풍경에서는 세부 묘사보다 먼저 큰 흐름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밑그림 단계에서 이 흐름이 어느 정도 잡혀 있으니 이후 펜 작업에서도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단순하게 처리할지 판단하기가 한결 쉬웠습니다.
2. 펜 작업: 돌 하나보다 돌담 전체의 흐름을 먼저 보았습니다
연필로 큰 구도를 정리한 뒤 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그림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은 역시 양옆의 돌담이었습니다.
돌담은 가까이 보면 돌 하나하나의 모양과 크기가 모두 다릅니다. 둥근 돌도 있고 납작한 돌도 있으며, 돌과 돌 사이에는 깊은 틈과 그림자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을 모두 따라 그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돌담 전체의 흐름이 복잡해질 것 같았습니다.

▲ 돌담과 나무의 질감을 펜 선으로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전체적인 덩어리를 먼저 정리한 뒤 필요한 부분에만 선의 밀도를 더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복사하듯 그리기보다, 돌담 전체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 먼저 보고 필요한 곳에만 질감을 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돌의 윤곽을 모두 같은 강도로 그리지 않고, 그림자가 깊은 부분과 가까이 보이는 부분에 조금 더 선을 모았습니다.
✒️ 돌담과 나무를 그리며 사용한 표현 방법
- 돌담의 질감: 모든 돌의 외곽을 똑같이 강조하지 않고, 틈과 그늘이 필요한 부분에 짧은 선과 점을 더해 거친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 선의 밀도 조절: 가까운 부분은 조금 더 선명하게, 멀어지는 부분은 형태를 단순하게 처리해 화면이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 나뭇잎의 표현: 잎사귀를 하나씩 따라가기보다 큰 덩어리를 먼저 보고 짧은 선과 점을 더했습니다. 모든 부분을 같은 밀도로 채우지 않아도 나무의 전체적인 흐름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작업을 하며 다시 느낀 것은 질감이 반드시 많은 선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을 계속 추가하기보다 어느 부분의 선을 줄이고 어디에 밀도를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이 오히려 더 중요했습니다. 특히 오래된 돌담처럼 복잡한 대상일수록 전체 흐름을 먼저 보고 부분적인 질감을 나중에 더하는 방식이 제게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3. 색연필 채색: 펜 선을 덮지 않고 봄의 색을 더했습니다
펜 작업을 마친 뒤 색을 더할지 말지도 고민했습니다. 선암사의 봄 풍경을 조금 더 화사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색이 강해지면 어렵게 쌓아 올린 펜 선의 담백한 느낌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색연필을 강하게 칠하기보다 펜 드로잉 위에 봄빛을 얇게 얹는다는 느낌으로 작업했습니다. 화면 전체를 색으로 채우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만 조금씩 색을 더했습니다.

▲ 펜 드로잉 위에 색연필을 얇게 더해 완성한 작업입니다. 돌담과 나무의 펜 선은 남겨두고 봄 풍경의 색감만 가볍게 더했습니다.
🎨 펜 드로잉의 느낌을 살리며 색을 더한 방법
- 식물과 하늘은 가볍게: 연한 색을 여러 번 얇게 올려 펜 선이 색 아래 묻히지 않도록 했습니다.
- 분홍빛은 필요한 곳에만: 왼쪽의 겹벚꽃 부분에 밝은 분홍색을 더해 봄의 분위기를 살리되, 화면 전체가 화려해지지 않도록 조절했습니다.
- 돌담은 한 가지 색으로 끝내지 않기: 회색만 사용하지 않고 갈색과 따뜻한 느낌의 색을 아주 약하게 더해 오래된 돌담의 분위기를 살려보았습니다.
마당 바닥 역시 펜 작업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색을 넣지 않았습니다. 바닥까지 세밀하게 채우기보다 어느 정도 여백을 남겨두니 중앙의 나무와 양옆 돌담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색연필 작업에서는 무엇을 더했느냐보다 어디에서 멈췄느냐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조금만 더 색을 올리면 풍부해질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펜 드로잉과는 다른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색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기보다 펜 선이 만든 분위기를 조금 보태주는 정도에서 멈추려고 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 다시 확인한 것
이번 선암사 돌담길 작업은 화려한 기법을 새롭게 시도한 그림이라기보다, 제가 그동안 여러 풍경을 그리며 조금씩 익힌 방식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 순천 선암사 돌담길을 그리며 정리한 펜 드로잉 포인트
- 세부 묘사보다 먼저 길과 돌담이 만드는 큰 흐름을 확인했습니다.
- 복잡한 돌담은 돌 하나하나보다 전체 덩어리와 그림자의 흐름을 먼저 보았습니다.
- 질감은 선을 무조건 많이 그리기보다 필요한 부분의 밀도를 조절해 표현했습니다.
- 색연필은 펜 선을 덮기보다 봄의 분위기를 조금 더하는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 모든 화면을 채우지 않고 일부를 비워두어 풍경의 답답함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마치며: 풍경 드로잉은 결국 오래 바라본 시간의 기록입니다
스케치북 마지막에 작업을 마치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풍경 드로잉은 단순히 눈앞의 모습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펜을 들고 한참 바라보는 동안 돌담의 방향과 나뭇가지의 흐름,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변화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지금 다시 봐도 비례가 아쉬운 부분이 있고, 선이 생각처럼 표현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강조하고 어디를 비워둘지 고민했던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 아쉬움 역시 이 그림의 일부로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풍경을 그릴 때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그린 한 장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같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록하는 것. 지금의 저에게 펜 드로잉은 그런 시간에 조금 더 가까운 작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