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사진보다 깊게, 펜으로 담아낸 찰나의 기록들
사진은 버튼 하나로 풍경을 박제하지만, 펜 드로잉은 그 풍경을 수천 번의 선으로 다시 짓는 과정입니다. 최근 며칠간 저는 제가 머물렀던 공간과 시선이 닿았던 풍경들을 세 점의 그림으로 옮겨보았습니다. 나무의 울창함, 눈 덮인 산사의 고요함,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의 원근감까지.
단순히 예쁘게 그리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종이 위에 '공간감'과 '질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선을 쌓았습니다. 오늘은 최근 완성한 세 점의 작업을 통해, 제가 사용한 펜 드로잉 테크닉과 작업 과정에서의 깨달음을 상세히 공유해 보려 합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께 작은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1. 숲의 숨결: 수평선과 점묘로 완성한 울창함
첫 번째 작업은 거대한 숲의 덩어리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제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밀도의 대비'였습니다.
① 하늘의 정적인 수평 해칭
하늘을 표현할 때 구름을 그리는 대신, 아주 정갈한 수평 선들을 촘촘히 배치했습니다. 이는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나무의 복잡한 선들을 아래로 눌러주며 화면 전체에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수평 해칭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② 잎사귀의 질감 표현
나무는 하나하나의 잎을 그리기보다 '빛을 받는 덩어리'로 해석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 부분은 강한 터치로 밀도를 높이고, 빛이 닿는 상단은 선을 아껴 밝음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하단의 풀과 들판은 선을 길게 뽑아 바람에 흔들리는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2. 설경의 미학: 그리지 않음으로써 표현하는 '여백'
두 번째 그림은 눈이 내린 시골집의 풍경입니다. 펜 드로잉에서 가장 어려운 소재 중 하나가 바로 '눈(Snow)'입니다. 펜은 흰색을 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① 화이트 공간의 활용
이 그림에서 지붕과 마당은 거의 손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주변의 나무와 담벼락, 건물의 어두운 면을 아주 진하게 묘사했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손대지 않은 종이의 흰 면은 눈부신 설경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펜 드로잉의 묘미인 '여백의 미'입니다.
② 앙상한 겨울나무의 선
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잔가지를 세밀하게 표현하여 겨울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담았습니다. 가느다란 펜 촉을 활용해 선의 굵기를 조절하며 가지의 앞뒤 관계를 설정해 주었습니다.

3. 남원 서도역: 철길이 선사하는 완벽한 투시법
마지막은 남원의 서도역 철길 풍경입니다. 이 작업은 투시 원근법(Perspective)을 연습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습니다.
① 소실점으로 향하는 선의 힘
철길의 침목들은 멀어질수록 간격이 좁아지고 크기가 작아집니다. 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만으로도 종이 위에는 깊은 터널 같은 공간감이 형성됩니다. 굽어지는 철길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② 자갈 바닥의 점묘 표현
철길 주변의 자갈들은 일일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대신, 불규칙한 점과 짧은 선들을 교차시켜 표현했습니다. 수천 번의 터치가 필요한 고된 작업이지만, 이 질감이 살아야만 철길의 금속성과 대비되는 거친 땅의 느낌이 완성됩니다. 작업 후 손목은 조금 아팠지만 가장 보람찼던 부분입니다.

결론: 꾸준한 관찰이 만드는 나만의 선
세 점의 그림을 연달아 작업하며 느낀 점은, 풍경을 보는 시간만큼이나 그림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울창한 나무도, 끝이 보이지 않던 철길의 자갈들도 천천히 하나씩 선을 쌓아가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세상으로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주변의 사소한 풍경 하나를 골라 펜을 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대상을 깊게 관찰하고, 나만의 속도로 선을 그어나가는 것 자체가 훌륭한 치유이자 기록이 됩니다. 저의 다음 작업은 또 어떤 풍경을 담게 될지 스스로도 기대가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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